철학과 개인생각이 아닌

거짓 죄책감과 진짜 죄책감

Esther_SL 2025. 6. 27. 11:32

성경 말씀은 모든 인류가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죄인임을 분명히 밝힌다.
의로운 사람은 없으며, 완전한 율법 앞에서는 모든 입이 닫히고 온 세상이 심판 아래 있다고 하셨다. (로마서 3장 19절)
요한은 우리가 죄가 없다고 주장하는 것은 우리 스스로 거짓말을 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거짓말쟁이로 만드는 것이라고 말하였다.
죄책감 자체는 나쁜 것이 아니라, 타락한 존재의 한 단면이다. 그러나 죄책감을 느낄 때,  거짓 죄책감과 진짜 죄책감을 구분해야 한다.
진정한 죄책감은 아무도 하나님의 은총을 얻을 만큼 선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겸손하게 만든다

진정한 죄책감: 죄를 자각하고, 하나님께 회개하며 돌이키도록 이끄는 성령의 역사
거짓된 죄책감: 이미 용서받았음에도 계속해서 자책하거나 스스로 벌을 주는 사탄의 속임
 
진짜 죄책감과 거짓 죄책감은 어디에서 부터 왔는지를 잘 판단해야 한다.
거짓 죄책감은 사탄이 가져다 준다.
어떤 일에 대해 무죄인데도 죄책감을 느끼게 하고, 우울증과 영적마비를 가져온다.
우리의 생각과 양심에 죄를 떠올리게 하여 하나님의 용서보다는 그 죄에 집중하게 만든다.
거짓 죄책감은 하나님 중심이 아니라 "나 중심"인 것이다.
 
“굳데이”라는 용어는 단순한 인사말이나 소속감의 표현을 넘어, 자신이 죄의 효력과 완전히 단절된 존재이며,
죄를 지어도 전혀 정죄받지 않는 신분임을 은연중에 세뇌시키는 것이다.
이 용어를 반복적으로 사용하면서, 자신을 의인이라고 믿게 하며, 자신이 실제로 죄를 지었거나 잘못을 반복한 경험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죄와 상관없는 의인이다”, “죄를 지어도 춤출 수 있는 사람이다”라는 인식을 통해 죄의 자각 자체를 무력화시키려고 한다. 이러한 신념이 단순이 자아확신을 넘어 죄에 대한 양심적 반응마저 신앙의 부족으로 간주화 하는 것이 문제이다.
심지어 죄를 자각하고 괴로워했던 과거의 자신을 “믿음이 부족한 상태”, 혹은 “십자가를 부정하는 태도”로 간주하며 반성하도록 만든다.
즉, 죄책감 자체를 신앙적 오류로 여기는 것이다.
“나는 죄를 지어도 의인이다. 그런데도 자꾸 스스로를 죄인으로 여기고 있었다. 그건 믿음이 아니다”
“죄를 지어도 상관없는 굳데이 안의 의인이다”
"알려주셔서 말미암아 알았다"
이러한 태도는  ‘죄를 자백한다’는 행위마저도,
하나님 앞에서가 아니라 ‘굳데이 정체성에 부합하지 못한 나 자신’을 향한 질책으로 변질된다.
이로 인해 회개는 더 이상 하나님과의 관계를 새롭게 하는 통로가 아니라, ‘신분을 확증하지 못한 신앙적 미성숙’을 자책하는 기제로 기능한다.
죄와 상관없는 의인임에도 여전히 내 죄를 끌어안고 스스로를 괴롭히는 일이 십자가를 무시하는 행위였고, 죄를 지어도 춤출 수 있는 의인이라는 극단적인 믿음은
죄책감 조차 "믿음 없음"으로 취급하고, 
극단적 정체성 유지를 위하 자기 확신을 믿으며
하나님과 상관없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점점 더 자기 합리화와 영적 무감각이 신앙의 중심이 되며
성화되는 변화의 삶보다는 자기 "의"로 엉뚱한 믿음을 갖게 되며 극단적 왜곡에 이르는 것이다.
 
하나님은 의의 기준이시다.
의롭다는 것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는 것이다.
우리의 모든 행동과 우리의 모든 삶이 그리스도에 의해서만 형성되기를 원해야 한다.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자유를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전혀 죄가 아닌 것을 죄로 여길 수 있다.
 
거짓 죄책감에 대한 치료법은 복음과 은혜이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들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느니라."
죄를 회개하면 하나님의 은혜에 기뻐하게 된다.
 

애매하게 섞어서 가르치는 교리를 잘 파악하고 판단하고 생각해봐야 한다.
단어들은 맞더라도 뜻이 왜곡될 수 있기 때문이다.

죄책감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위치를 측정하는 척도가 아니다.